거대한 나무 아래, 사람들이 조용히 멈춰 선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다.

누가 먼저 시선을 돌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은행나무 앞에선 모두가 말을 아낀다.

나무는 36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그 옆의 정자는 수백 년을 이어온 정신을 품고 있다. 10월 초 현재는 아직 초록이 남아 있지만, 단 2주 후면 이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수천 장의 노란 잎이 동시에 떨어지며 마치 바닥에 천을 깐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 아래에서 정자는 더 깊은 정적을 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한다.

가을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곳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경주 유연정

“보호수 지정된 360년 은행나무, 이번 달 말 풍경 최고조”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사라길 79-19에 위치한 ‘유연정’은 조선 순조 11년 안동 권 씨 일가가 세운 정자다. 조상을 기리는 목적으로 건립된 이곳은 고려 태사공을 비롯한 권행, 권산해, 권덕린 등 가문의 주요 인물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자 자체는 유교적 가치와 함께 도연명의 자연사상을 반영해 설계됐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배치 구조는 주변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정서적 울림을 주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정자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존재는 바로 그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수령 360년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키와 둘레 모두 웬만한 보호수를 상회하는 수준이며 특히 가을철에는 그 모습이 극적으로 변한다. 10월 중순부터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해 하순에는 바닥까지 모두 낙엽으로 덮인다.

이 시기에는 나무 주변이 자연스레 포토존으로 전환되며 많은 방문객들이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은행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닌, 지역 주민들이 수호목으로 여기는 상징적 존재다. 지금도 이곳을 지나는 이들 중 일부는 나무 앞에서 잠시 멈춰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모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나무 주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특히 노란 잎이 가득 덮인 시기에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색으로 통일되며 정자와의 조화가 완성도를 높인다.

유연정은 연중무휴로 무료 개방된다. 자가용 이용 시 인근에 마련된 주차 공간을 이용할 수 있으며 별도의 예약이나 입장절차 없이 자유롭게 방문 가능하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유선 연락(054-779-6100)을 통해 안내받을 수 있다.

정자와 나무가 만드는 무언의 가을 풍경을 마주하러 이번 10월 유연정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