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년 고도에서 만난 한국의 흔적

일본 교토, 고즈넉한 주택가의 돌담길 끝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과 마주한다. 여행지로 잘 알려진 절이나 고성이 아닌, ‘고려미술관’이라는 이름의 한옥형 건물.
천년 고도라 불리는 교토 한복판에, 그것도 일본의 전통과 역사가 고스란히 축적된 도시 한복판에 한국의 문화유산을 오롯이 전시하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낯설고 의미 있다.
특정한 관광지를 둘러보기보다는 장소가 품은 시간과 맥락을 함께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문화적 기원과 연속성을 보여주는 박물관은 깊은 울림을 준다.
고려청자부터 조선백자, 회화 및 공예품, 통신사 유물까지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산들이 한 사람의 수집을 통해 모이고, 전시되고,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전시’ 그 이상의 질문을 던진다.

누가, 왜, 어떻게 이 공간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는 순간, 장소는 목적지가 된다.
일본의 중심에서 한국의 문화 뿌리를 간직하고 있는 미술관에 대해 알아보자.
고려미술관
“조용히 한국을 지켜온 교토의 미술관”

일본 교토 북부 주택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고려미술관’은 교토역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으며, 외부는 돌담과 석물로 꾸며져 있어 전통적인 미감을 자아낸다.
1988년 설립된 이 미술관은 재일교포 1세 기업인이었던 고(故) 정조문 선생이 평생 수집한 1,700여 점의 유물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조선 백자 항아리를 처음 마주한 1955년을 계기로 그는 일본 각지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고, 자신의 집과 유산을 기증해 미술관으로 완성했다.
고려미술관은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한국 문화유산만을 전시하는 사립 미술관으로 평가받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백과사전에도 “우리 문화유산만을 전시하는 유일한 해외 미술관”이라는 점이 강조돼 있다.

정조문 선생의 뜻은 장남 정희두 현 대표에게 이어졌고, 그는 미술관과 연구소 운영을 맡아 매년 2~3회의 기획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전시 공간은 2개 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1층에는 청자, 나전, 자수 병풍, 통신사 관련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자료도 소장되어 있어 문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2층은 정조문 선생의 사진과 생활공간을 재현한 형태로, 전통 공예품과 함께 그가 수집한 항아리, 옹기, 석탑 등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정희두 대표가 가장 아끼는 유물은 바로 1955년 부친이 처음 구매한 조선백자 항아리다.

당시 50만 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일 년에 걸쳐 대금을 나눠 갚았다는 이 항아리는 미술관 설립의 출발점이자,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 대표는 “이 항아리는 전쟁 이후 한국이 다시 일어서던 시기의 기운이 담긴 상징”이라고 말한다.
미술관은 운영 37년 차를 맞았지만, 재정 여건은 여유롭지 않다. 공개된 재무상태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순 자산은 약 4억 5천만 엔으로, 전년보다 약 7천만 원 가까이 줄어든 수치를 보였다.
유물 보존과 시설 유지·보수에 필요한 예산이 꾸준히 드는 현실에서, 일본 내 후원 회원 약 200명의 기여로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유물 구매는 물론 보존 처리, 복원 비용까지 감안하면 장기적인 재정적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정 대표는 “전통 방식으로 유물을 제대로 보존하려면 구입비의 10배에 달하는 비용이 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을 지켜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고려미술관을 “자기 뿌리를 돌아보는 공간”이라 정의하며,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 모두에게 “우리 문화가 이 땅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중한 메시지”라고 강조한다.
정조문 선생이 생전 작가 시바 료타로 등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꾸준히 발간했던 기록은 단순한 수집이 아닌 문화 간 대화의 장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정희두 대표는 “이제는 그런 역할을 해줄 젊은 세대가 더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이 공간이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음 세대를 위한 접점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문화가 단절되기 쉬운 시대, 일본 땅에서 한국의 흔적을 지켜가는 단단한 의지의 공간이 지금도 조용히 문을 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