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추천 여행지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아침, 작은 돌계단을 따라 걷다 보면 사람의 말소리도, 자동차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을 들면 언덕 위로 십자가가 보이고 그 아래엔 한 남자의 묘소가 놓여 있다.
조선 후기,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내놓았던 한 인물의 흔적은 지금도 고요한 언덕을 지키고 있다.
그 주변에는 그를 따랐던 신자들과 어머니, 외국 선교사의 묘가 함께 자리하며,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 땅에 뿌리내렸는지 보여준다.
종교적 관점과는 별개로, 이 장소가 주는 정서는 깊고도 조용하다.

금빛 단풍이 지나가고 겨울 초입의 바람이 차가워지는 11월 넷째 주, 사람 없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조용한 순례길로 떠나보자.
미리내 성지
“입장료·주차료 없는 무료 개방지, 11월 정적 속 역사탐방 적기”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에 위치한 ‘미리내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다.
이곳은 1830년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형성한 교우촌에서 비롯됐으며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순례 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과거에는 마을의 불빛이 달빛 아래 냇물에 반사되어 마치 하늘의 별처럼 보였다고 전해진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순교 후 40일이 지나 신자 이민식 빈첸시오가 몰래 수습해 등에 업고 이곳까지 옮겨와 장사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성지 한가운데에는 그의 묘소가 있고, 그 곁에는 어머니 우르술라, 프랑스 선교사 페레올 주교, 유해를 운구한 이민식 신도의 묘가 나란히 자리한다. 단지 무덤이 아니라 역사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이 성지의 성역화 작업은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으며 1989년에는 천주교 103위 순교 성인을 기리는 대성전이 완공됐다.
성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대성전이 눈에 들어오고, 그 뒤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총 15점의 청동 조각으로 구성된 이 길은 예수가 고난을 겪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순례자는 이 길을 따라 걸으며 고요한 사색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바위를 그대로 활용한 기도 공간인 ‘겟세마네 동산’, 김대건 신부의 하악골이 안치된 미리내 성당, 성모 성당과 신부 동상 등도 차분한 분위기 속에 배치돼 있다.

전체 관람에는 약 2~3시간이 소요된다. 길 자체는 평탄하고 오르막이 많지 않아 고령자도 무리 없이 돌아볼 수 있다.
일부 구간은 숲길처럼 조성돼 자연과 인공 구조물이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이 많지 않은 평일 오전에는 더욱 조용한 성찰의 시간이 가능하다.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는 성소로,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한 인물의 생애와 그를 둘러싼 시대를 되새길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 기능한다.
입장료는 없으며 주차장도 무료로 제공된다. 성지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되며, 평일 미사는 오전 11시 30분, 주일 미사는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진행된다.

특히 미사가 없는 시간대에는 비교적 조용한 환경이 유지돼 말없이 걷고 싶은 이들에게 적합하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뒤, 시신조차 매장할 수 없던 시절, 한 신자의 등에 실려 이 산골짜기까지 옮겨졌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11월의 끝자락, 풍경보다 조용한 의미를 찾고 싶을 때, 묵묵히 걷는 순례길만큼 명확한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던 옛 마을의 기억과, 침묵 속에 깃든 믿음의 흔적이 함께하는 이곳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