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 구제시장, 달라진 풍경

“최근 들어 손님이 더 줄었어요.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코로나 때보다 손님이 더 준 게 체감됩니다.”
서울 종로구 동묘 구제시장 상인들은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며 한 목소리로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때 ‘가성비 쇼핑’의 대명사로 불리던 구제시장과 빈티지 숍들도 최근 고물가와 경기 침체 속에서 위축되고 있다.
빈티지 감성을 찾는 젊은 층의 방문은 꾸준하지만,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실제 구매까지 이어지지 않아 상인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 3번 출구에서 나와 동묘공원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동묘 구제시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인 색색의 옷더미를 시작으로 골목마다 구제 옷 가게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동묘가 ‘빈티지의 성지’로 자리 잡으면서 개성 있는 옷을 찾는 10~20대 젊은이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겨울 아우터부터 아디다스·나이키 같은 유명 브랜드 맨투맨 티셔츠까지 단돈 1만 원에 구입할 수 있다. 더 저렴한 곳에서는 청바지 두 벌을 5천 원에 판매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쇼핑백을 든 손님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MBC TV 예능 ‘굿데이’에서 정형돈이 지드래곤에게 줄 나이키 재킷을 구매했던 한 가게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게를 찾은 한 20대 남성은 “서울에 친구들을 만나러 온 김에 구제 옷으로 유명하다는 동묘에 와봤다”며 “확실히 옷들이 저렴하긴 하지만 구매는 안 하고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라고 말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상대적으로 구매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벨기에에서 온 루카스 씨와 벤저민 씨는 “한국에서 공부하는 벨기에 친구가 동묘를 소개해 줘서 방문했다”며 “옷 가격이 합리적이고 동묘만의 ‘쿨한 무드’가 있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지난달 2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4분기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 290만 3천 원 중 증가한 항목은 주거·수도·광열·음식·보건 등 필수 지출 분야였다.
반면 의류·신발에 대한 지출은 전년 동기 대비 0.3% 감소해 17만 원에 그쳤으며, 전체 소비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5.9%에 불과해 12가지 소비지출 항목 중 네 번째로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경기 불황과 물가 상승으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구제시장 상인들은 가격을 더 낮춰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상인 C 씨는 “우리 가게는 거의 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옷을 들여오는데, 같은 옷이라도 예전보다 수입가가 올라 판매 가격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라며 “하지만 가격을 올리면 손님들이 더 줄어들어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상인 B 씨 또한 “물가는 오르는데 가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판매 가격을 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지하자니 손님이 줄어 결국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양천구의 한 빈티지 숍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이곳에서는 옷 1kg당 2만 5천 원에 판매하고 구매량이 많을수록 1kg당 가격이 낮아져 더욱 저렴하게 살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매장 내부는 다양한 의류로 가득 차 있었고 일부 옷은 태그가 그대로 붙어 있는 새 상품도 포함돼 있었다.

이곳을 찾은 23세 김 모 씨는 “물가 상승이 확실히 의류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며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싶어 굳이 새 옷이나 비싼 옷을 사기보다는 빈티지숍을 자주 찾는다”라고 말했다.
김 씨는 니트, 블라우스, 청바지, 정장 바지를 한 벌씩 고른 후 계산대로 향했으며, 총 3만 5천 원을 지불했다. 일반적으로 옷 한 벌 살 가격으로 총 네 벌을 구매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장은 한산했다. 약 한 시간 동안 매장을 찾은 손님은 7명가량이었지만 실제 구매까지 이어진 사람은 김 씨 한 명뿐이었다.
매장 관계자는 “고물가라고 해서 손님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 때보다 더 줄어든 것 같다”며 “지금도 충분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더 낮은 가격대를 찾는 손님이 많아 고민이 크다”라고 말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동의 한 구제 의류 매장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층 규모의 대형 매장에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가게를 둘러보는 외국인 방문객들이 많았지만 실제로 여러 개의 상품을 구매하는 ‘큰손’ 고객은 드물었다.
대부분 사진을 찍거나 옷을 착용해 본 뒤 다시 내려놓고 떠나는 모습을 보였다.
인하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는 “의류 소비는 필수 지출이 아닌 ‘선택적 지출’이기 때문에 고물가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의류 시장의 주요 소비층인 젊은 세대는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패션에 관심이 많지만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