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너머의 이야기

공원이란 개념 자체는 근대에 등장한 서구의 발명품이다.
산업혁명 이후 도심 인구가 급격히 늘자 대중이 함께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졌고 이를 위해 왕실과 귀족의 사유지를 일반 시민에게 개방한 것이 공원의 기원이다.
인천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자 가장 오래된 근대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양식’, ‘근대식’이란 수식은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애초에 ‘공원(public park)’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은 자발적인 근대화를 선택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열강의 압박 속에 근대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공원 역시 외세의 개입 아래 조성됐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인천은 1883년 개항과 함께 외국 조계지로 구성되며 미국, 러시아, 일본, 영국, 청나라 등 열강이 자국민의 거주 공간을 확보했다.
이들은 각국 공동조계의 중심에 외국인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을 만들기로 합의했고, 그 결과 1888년에 ‘각국공원(또는 만국공원)’이 탄생했다. 이는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 앞선 시점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인천에 있던 일본공원의 서쪽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서공원’으로 불리게 됐다.

해방 이후엔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렸고, 1957년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해 ‘자유공원’이라는 명칭이 자리 잡았다.
이처럼 공원의 명칭 변화는 곧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919년, ‘한성임시정부’가 거론된 공간
자유공원이 슬픔의 역사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국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됐다.
국내에선 홍진(1877~1946)을 중심으로 법조계와 각계 인사들이 함께 한성임시정부 설립을 추진했고, 4월 2일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 장소로 선택된 곳이 바로 인천의 만국공원이다.
공원의 상징성을 활용해 각 도 대표들은 ‘만국의 광장’에서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했다. 당시 항일 지하신문이었던 ‘독립신보’는 4월 10일 자 호외에 한성임시정부 초대 내각 명단을 발표했고, AP통신은 이를 해외로 송출했다.
이후 국내외 임시정부는 통합 논의에 돌입했고,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이 임시정부는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계승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만국공원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형성된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결과였다.
자유공원의 상징, 맥아더 동상
자유공원은 인천 중구 송학동, 해발 69미터의 응봉산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조형물은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지만, 공원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단연 맥아더 장군 동상이다. 공원 명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강한 햇빛을 등진 맥아더 동상은 역광 속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보인다. 남서쪽 제물포구락부 쪽 계단을 오를 때도, 북동쪽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방향에서도 동상이 눈에 띄게 자리하고 있다.
맥아더 동상 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1982년에 세워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나온다.
이 조형물은 미국과의 수교가 1882년에 이뤄졌음을 기념하며 만들어졌으며, 최만린 작가의 청동 조각 ‘움직임: 그 100년’이 함께 설치돼 있다.

탑에 새겨진 글귀는 시인 박두진의 작품이다.
전망 좋은 누각, 석정루와 연오정
기념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팔각 2층 구조의 정자인 석정루가 있다. 1966년, 30여 년 동안 자유공원을 산책하던 사업가 이후선 씨가 건립해 기증한 것으로, 공원에서 가장 전망이 뛰어난 장소다.

이곳에 서면 인천 앞바다, 월미산, 인천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석정루보다 앞서 1960년에 세워진 연오정은 육각형의 정자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장소로 알려졌지만, 이와 관련한 안내문이나 표지석은 따로 없다.
연오정 인근 도로변에는 2020년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 헌수비’가 놓여 있으나 정확한 위치나 의미는 해석이 어려운 상태다.
과거 공원 내에는 지금은 사라진 다양한 근대 건축물들도 있었다. 영국 사업가 제임스 존스턴의 별장, 독일계 세창양행의 사택, 청나라 외교관 오례당의 저택 등이 대표적이지만,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소실됐다.

공원을 거닐다 보면 오랜 세월을 견뎌온 수목들과 마주하게 된다.
은행나무, 양버즘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산뽕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있지만, 특히 광장 서편 난간 아래 우뚝 선 양버즘나무가 인상적이다.
이 나무는 1884년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유공원보다도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나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조계지의 흔적, 청·일 경계
자유공원은 주변 공간까지도 함께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응봉산 남쪽을 통과하는 아치형 석문인 ‘홍예문’은 1908년에 축조된 시유형문화재로, 당시 인천 항구와 한국인 마을의 경계로 기능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거주 구역을 넓히기 위해 만든 구조물로, 지금은 인천의 대표적인 역사 건축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공원 남서쪽 아래 자리한 옛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개항기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국적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이었으며, 현재는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곳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이 돌계단은 청나라와 일본 조계의 경계였던 곳으로, 경사면에는 계단참과 함께 좌우로 석등이 설치돼 있다.

왼편은 청나라식 석등, 오른편은 일본식 석등으로 꾸며져, 두 문화가 대비되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계단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차이나타운이, 오른쪽에는 일본식 건축물이 늘어서 있어 당시 인천의 조계지 분위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또 인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평가받는 ‘대불호텔’이 2018년에 복원돼 그 시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